자기개발

28년 지난날의 회고와 은퇴결심

복이있나니 2022. 1. 22. 18:16

이곳에 나의 가난에 대한 인생 이야기와 경제 관념에 대해 회고를 하며 기록해보려고 한다. 글을 잘 쓰지 못하지만, 돈에 욕심을 가지게 된 이유를 찾아보고자 나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다. 참고로 누구에게도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나의 연대기를 설명해본 적 없다. 약간 나니의 나무위키 같은 느낌이랄까? :) 내 라이프로그 기록장이니 상관없겠지.

나는 중학교 시절까지도 우리 집 형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비교해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의 기억이 불행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나는 친구들과 원만하게 사이좋게 놀았고 다른 아이들 못지않게 피아노 학원도 다녔다. 주기적으로 온가족이 함께 놀러도 많이 다녔다. 아빠가 나름대로 밖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낚시도 많이 다니고 여행, 캠프, 놀이공원, 주말농장까지 골고루 놀아주셨다. 이런 기억들이 형편과는 관계없이 그리운 향수처럼 남아있다.


현실적으로 우리 집은 가난했다.
내가 8살 무렵 집은 인천의 한 5층짜리 공무원 임대 주공 아파트에 살았다.
아빠는 그 당시 공무원이셨고 엄마도 세탁소 일로 맞벌이를 하셔서 동생과 둘이 집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집은 낡고 좁았으며 재개발이 된다고 주민들이 없어 흉흉한 상태였다.
화장실은 너무 좁아서 공중화장실 변기 한 칸만 한 곳에 변기와 세면대가 붙어있다시피 했고
부모님은 종종 돈 이야기로 물건을 집어던지며 우리 앞에서 싸우셔서 두려움에 떨고
밤에 잘 때에는 부모님이 이혼하지 말게 해달라고 손을 모아 기도했다.
아빠는 매일 쥐꼬리만한 45만 원 월급을 받으며 공무원들 비위 맞춰주느라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셨으며
삼성전자에 다니시는 외삼촌은 우리 집에 와보더니 동생과 나를 보며 불쌍하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 집에는 많던 장난감들도 우리 집엔 별로 없었다.
이런 우리 가족이 싫었고 나는 이 가난을 기억하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우리 집은 엄마가 삼촌께 돈을 빌려 대출을 끼고 새 32평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주변에 편의점도 마트도 잘 되어있지 않은 논과 밭이 대부분인 개발 중인 동네였다. 전집에 비하면 크고 넓은 신축 새 아파트에 이사 왔다는 것만으로 좋았고 나는 이 정도면 잘사는 거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아빠는 공무원을 그만두고 40세가 넘는 나이에 백수가 되었다. 자세한 사정은 설명하기 힘들겠지만 젊은 나이에 아이가 둘 있는 아버지의 실직은 중대 사항이었다. 매일같이 아빠는 집에서 백수 생활을 하며 먹고 자고 게임만 해대셨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두 번이나 악재를 맞으시고는 많이 힘들어하셨고 각성을 하셨는지 대학원 석사를 땄으며 건설 사업을 시작하셨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아빠는 사업을 명목으로 엄마와 상의도 없이 집을 나가셨다.

지금은 건설업 사업이 꽤나 잘 되어 직원들 두세 명 정도 거느리며 엄마에게 생활비 신용카드를 넘겨줄 만큼의 여유가 될 정도로 사업을 일궈내셨다. 다시 일어서서 시작해 이 정도로 이뤄낸 것이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럽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른 대가도 따랐는데 아빠가 나간 이후로는 엄마는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부부로써 따로 산다는 것은 이혼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나름대로의 아빠가 성공함으로써 물론 나에게도 떨어지는 건 있었다.
바로 대학시절 등록금과 생활비와 원룸비 그 정도는 아빠가 유일하게 쿨하게 나에게 투자한 돈이었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썼지만 쓸 때마다 불편하고 속에선 미안한 감정이 매일같이 들었다. 나름 돈을 마음대로 쓰는 것에 대한 죄책감 정도는 가지고 있었나 보다.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초등학교 땐 온갖 그림 대회에 나가 상들을 타왔었다.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었고 그만큼 열심히 재미를 붙여가며 노력했다.
또 게임을 좋아했다.
재미로 시작해서 레벨 업 하는데 흥미가 생기고 퀘스트를 해서 아이템을 얻고 만렙 이후에 마저 좀 더 강해지기 위해서 꾸준히 여러 온라인 게임을 했었다. 내 나름대로 어떻게 하면 더 강해질 수 있는지 찾아보고 열심히 즐겼던 기억이 있다.
종종 '너는 여자애가 게임에 관심이 많니?'라는 소리도 듣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나는 기분이 좋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나는 욕심도 많고 승부욕도 많은 사람이라서 그렇다. 남자아이들이 하는 놀이까지도 전부 할 줄 알고 '잘' 해야 직성이 풀렸었다. 그 당시 유행했던 딱지치기, 유희왕 카드, 탑블레이드 팽이놀이 등 여자 남자 놀이할 것 없이 모든 놀이에 참여하고 즐겼으니 말이다. 이것은 내 기준 장점이었다. 이후로 모든 일을 게임하듯 했고 이 방식은 효율이 좋았다. 도전하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았고 노력 대비 효율을 중요시하는 '효율 충'이 되어 만족한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나는 A형인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소심한 사람이야라고 계속해서 각인되어 있다 보니 학교에 가서는 말을 몇 마디 안 할 정도로 소심한 아이였으며 집에만 오면 춤추고 날뛰는 이상한 애였다. (아마 그 당시 나와 같은반었던 아이들은 내 본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B형인 걸 알았을 때부턴 그냥 본래의 내 성격인 망나니로 살았지만..
친구들 모두가 나에게 독특한 애라고 한다. 나는 내 지인 모두가 하나하나 독특하고 개성 있는 캐릭터라 생각하기에 속으로 웃는다.

중학교 땐 공부하기를 극도로 싫어했고 못하기도 했다. 공부방까지 다녔는데 수학은 나머지 공부를 할 정도로 평균이 하였다. 그래서인지 집에 오면 공부 대신 매일 무선 공 부장에 그림을 그려댔다. 그렇게 취미로 그린 것만 10권을 될 것인데 모두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만화 보는 것도 좋아하고 그리는 것도 좋아해서 스토리 구상까지 하며 매일 그렸던 게 생각난다. 나중에는 쌓여서 10권 정도 그렸던 거 같다. 그렇게 미술 하나만 믿고 인문계 미술 중점 고등학교를 지원하고 입학했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동양화과와 디자인과를 고민하다가 결국 돈을 잘 번다는 선생님들의 말에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의 결정은 만족스럽다. 지금의 직업에 만족도가 높다.
또 나는 공부를 해야 할 시기임에도 수능을 보지 않을 정도로 놀기를 좋아하는 개념 없는 학생이었다.
지각을 밥 먹듯이 했고 수업 시간에는 매일 잠을 잤던 게 기억난다.
그런데 입시에는 진심이었다. 미대 준비를 약 1년 동안 홍대의 미술 학원으로 다녔고 11시까지 입시 그림을 그리다 집에 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때의 나는 경제관념도 없고 철도 없는 가난을 하나도 모르는 고등학생이었기에 한 달에 150만 원이나 하는 학원비를 턱턱 내며 한 잔에 4,500원씩 하는 버블 티나 음료를 매일 사 먹고 홍대 거리에 있는 마음에 드는 옷들을 카드로 아무렇지 않게 샀다. 우리 집은 잘 사는 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이후였지만 엄마가 힘들게 벌어온 돈을 나는 그렇게 물 쓰듯이 썼던 것이었다. 그게 자식으로서 누리는 당연한 권리인 줄 알았다.

엄마는 정말 나를 위해서 몸 바쳐 모든 것을 희생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나는 못된 철없는 딸이었다.

그 이후 수시로 평범한 지방대학교에 합격했다. 원했던 시각디자인과를 선택해 대학교를 입학했고 내 경제관념은 그때도 형편없었다. 아빠가 타지 생활을 한다고 나에게 신용카드를 줬던 게 나를 더 흥청망청 돈의 가치도 개념도 모르는 사람으로 자라게 만들었다.
하루 두 끼 꼬박 모두 사 먹고 미술 재료비까지 합하면 족히 다달이 100만 원씩은 긁어댔다.
그러다 대학 동기 중에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그걸 갚느라 과제와 병행하며 알바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저 힘들게 사느라 불쌍하다, 힘들겠다처럼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때 친구들은 나를 보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자취를 했으며 먹고 싶은걸 먹었고 사고 싶던 재료를 살 수 있었으니까..
그때 당시엔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러다 돈이라는 것을 스스로 벌어보고 싶어졌다.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경제적으로 소득을 직접 얻어내면서 깨달았다.
엄청난 도움을 받고 컸구나.. 아무런 대가 없이 엄청난 투자를 받으며 자랐구나..

25살 이후의 나는 스스로 번 돈 하나 없이, 학자금 대출하나 없이 부모님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한 것에 감사하며 살았다.
얼마나 스스로 편하게 살았고 바보같이 돈을 펑펑 써왔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접 두 번의 인턴생활과 세 번을 아르바이트생 활로 돈을 벌어보니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게 번 돈인지 알게 되었다.
부모님은 아등바등 돈을 모아 온전히 나에게 투자하셨다.

이 사실을 깨닫고 경험했던 나는 변했을까?
아쉽게도 3년의 직장 생활을 하며 번 돈은 온전히 모을 수 없었다. '아껴서 써야지' '저축을 해야지' 생각만으로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나는 항상 목표가 없었고 계획이 없었다.
친구들과의 만남에 쓰고, 사고 싶은 옷과 가방을 사며 월급은 받자마자 순삭 되었다.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며 쓰고(대부분은 숙박, 밥, 여행 비용으로 지출했다.) 결국 저축해 모으는 돈은 다달이 50만 원도 되지 않았다.
지금 되돌아보면 후회스럽다. 조금만 더 일찍 정신 차릴걸, 조금만 더 빨리 돈을 벌고 싶어 할걸..


딱하나 후회되지 않는 것은 동반자를 빨리 만나 결혼을 한 것이다. 돈을 모으고 싶다는 의지를 다지고 경제관념을 얻게 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100만 원, 200만 원은 천원 쓰듯 우습게 지출되었다.

현실에 부딪혔고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았다.
우리는 모아논 돈이 없었고 전세대출과 마이너스 통장을 까 결혼자금에 보탠 부부였다.
요즘 세상에 이 정도 빚 없는 신혼부부가 있냐고 하겠지만 나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아이를 낳을 거냐고 모두가 물어봤고 나는 내 현실을 말하고 못 낳겠다고 말했다.
부모님은 '아이를 낳지 않을 거면 결혼은 왜 했냐' ' 이기적이다'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나는 아이를 낳는 것은 샤넬 명품 백을 할부로 지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분명 그만큼의 가치와 그만큼의 행복이 되돌아올 것이고 행복할 것이다.
현실 감각이 없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그 이후에 감당해야 할 금전적인 부분은 외면한 채 질러버린다. 그 행복이 큰 것은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현 시킬 수 없는 현실이 아쉬웠다.
나는 그래서 부자가 되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해 걱정 없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보면 가상의 세계에 사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그는 잘 돌아가는 가상현실에서 굳이 탈출하려 한다.
모두가 각본 있는 정해진 삶에 순응하고 살아갈 때 그곳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선택하려 하는 것이다. 주변인들은 사실을 부정하고 막아선다.
실제로 내가 이런 말들을 이런 곳에 써두고 나 직장 그만두고 '내 재능을 이용해서 돈을 벌 거야!'
'나는 부동산 공부를 할 거야!' '주식을 시작해서 시드를 모을 거야'라고 하면 누군가는 '내가 해봤는데 다 결국 잃더라~' '내가 해봤는데 쉽지 않아 잃어봐야 정신 차리지' '시드가 많아야 부동산을 하던가 하지' '하던 일을 열심히 하는 게 났지 않을까?' '뭘 그렇게 열심히 살아 나니 너는 아직 젊잖아'라는 말들로 돌아온다. 아마도 자신들이 실해한 사례를 많이 봐왔기에 진심으로 하는 말일 것이다.
관심이 없다면 그냥 조금 응원의 메시지 정도를 보낼 것이다. 해보라고 하는 사람들도 '그냥' 하는 말일 것이다.
왜일까..? 성공한 사람의 숫자가 적기 때문이다. 만약 다 성공했다면 모두가 부자가 되었겠지. 또 사람은 남의 인생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딱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에게 영감은 줄지 몰라도 같이하자고 강요할 생각은 없다.


한 유튜버는 이런 현상을 바구니 속 크랩 이론이라고 표현한다. 바구니 속 게들은 서로를 집게로 잡아 탈출하려는 자를 끌어내린다.

현실에 순응하고 고 그냥 살아가라고,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일이 정당하고 옳은 일이라고 어떻게든 합리화하려고 한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부정하는 것이니까.. 나는 어차피 안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실 제대로 시도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긍정적인 응원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에 뭐라고 하던 상관은 없다.

나는 몇 개월이 걸리던 그 주인공처럼 정해져있는 각본에서 벗어나 굳이 다른 길을 선택하고 싶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을 나는 존경한다. 그들은 결국 돈과 시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은 내 인생 끝까지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몇십 원이라도 스스로 벌수 있는 업을 가져야 한다. 내가 잘하고 즐길 수 있는 업이면 더더욱 좋다.
한 달에 자신의 업으로 30만 원을 벌면 3억의 자산을 가진 것과 다름없다.
나는 결혼 덕에 재테크에 관심을 가지고 온갖 재테크 및 경제 유튜브를 보고, 관련 서적 찾아보고 자기개발을 위해 투자하려는 노력들을 하나씩 해나가고 있다.
지금도 나 빼고 모두가 부자가 되어가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때 내 열등감은 폭발했고 과거에 가난에 고통받았던 나를 끄집어냈다.
가난은 축복이라는 말을 들었다. 돈에 대한 갈망과 욕구를 증폭시켜 줬었기에 공감되었다.
되돌아보니 나는 불평불만 없이 정해진 삶을 살아왔었던 것 같다.

나는 부모님께 보답을 위해 부자가 되어 갚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경제적 자유를 이뤄야 하는 이유이다.
온전히 노동 시간을 써서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을 구축할 공식이 있다. 나는 입시할 때도 카피 하나는 잘했으니 부자들의 공식을 따라 하면 나도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고 한 주식과 부동산 관련 유튜브를 들으며 가슴이 뛰었다.

'모두가 부자가 될 순 없지만 그게 나이면 된다' '다른 사람의 지혜를 습득해야 신분 상승이 가능하다'
'직접 도전하는 사람은 1%' '지금 같은 시대에 가난한 건 죄다'

내 사람들과 돈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내 최종 목표이다.
누가 들으면 욕할지 모른다 이게 가난했던 거냐고, 욕심이 많은 나는 돈이 없어서 겪는 불편함과 치졸함과 그 감정이 싫었다.
그래서 나는 35살에 은퇴할 것을 결심했다.
이 각오는 '내성적인 건물주'라는 유튜버를 보고한 결심이기도 하다.


한 번뿐인 인생 타인에 의해 나의 인생이 결정되는 삶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내 몸값을 올려 돈을 벌며 자유로운 삶을 사는 부자가 되고 싶다.
나를 위해 투자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주식공부, 부동산 공부에 대한 정보들을 공유할 것이다. 놀랍게도 공식이 있다고 한다.
자세한 계획과 목표는 앞으로 이곳의 부자가 되는 공식을 차근차근 포스팅해가며 정리할 예정이다.
나는 나와 관련된 지혜로운 이들이 노력을 하고 자신만의 노하우로 함께 부자가 되는 공식을 알았으면 좋겠다.

쓰다 보니 구구절절 너무너무 길어졌다 ㅎㅎ
28살까지의 모든 과정이 담겨있지는 않지만

기록과 사기충천에 의의를 둬서 뿌듯함이 남는 포스팅이다.

여기까지 긴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